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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xhibition <Nostalgic Energy Source: Coal> 지역과 함께하는 <석탄시대>

전시기간 : 2024.4.26.(금) ~ 2024.9.22(일)

장 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수, 토: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 관람문의 : 02-3703-9200

전시를 열며 Exhibition Introduction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내 최대 규모의 탄광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가 올해와 내년 차례로 문을 닫습니다. 산업 성장의 동력이자 서민의 연료였던 석탄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문경·보령·태백석탄박물관과 함께 찬란했던 대한민국의 석탄시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자원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석탄은 유일하게 경제적 이용이 가능한 화석연료입니다. 따라서 산업 발전의 소중한 동력원인 석탄 생산을 큰 폭으로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하에서 긴 시간을 열과 압력을 견뎌 탄생한 석탄과 같이 광부들은 무덥고 깜깜한 탄광 속에서 쉼 없이 일하며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뒷받침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전국의 광업소는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남겨진 석탄산업유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해 나갈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문경석탄박물관
‘문경’은 우리나라 석탄산업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입니다. 근대화의 시작과 함께 광산이 개발되어 지난 반세기 동안 국내 제2의 탄전지대로서, 현대사의 질곡桎梏을 함께 한 석탄역사의 산 현장입니다. 산업발달과 에너지 사용의 패턴변화로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면서 1994년 은성광업소를 마지막으로 우리 문경지역의 광업소가 모두 폐광되어 점차 그 흔적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번 공동기획전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석탄산업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경제부흥의 최일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광부들의 삶의 애환과 노고를 담아 감사를 전하며 문경지역 광업의 역사 속에 지닌 의미와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보령석탄박물관
「보령에 정말 탄광이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보령은 머드축제로 유명한 관광도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보령은 충남 최대의 탄광도시였습니다.
보령의 석탄산업은 1940년대 말에 시작하여 1980년대 화력발전으로 최전성기를 보내고 1994년 마무리되었습니다. 평범한 농어촌이었던 보령은 갑자기 탄광도시가 되었고, 폐광 이후에는 곧장 관광도시로 변화해 갔습니다. 석탄산업 유산의 보존에도 힘써왔지만, 극심한 변화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탄광도시 보령」은 시민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번 공동기획전이 온 세상의 동력이었던 석탄과 그 시대를 조망하고, 폐광지역이 함께 연대하여 석탄산업유산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석탄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태백석탄박물관
‘태백’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으면 많은 이들은 석탄, 연탄, 광부, 탄광 등이라 대답합니다.

과거 중요 에너지자원으로서 생활 연료 공급과 기간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석탄의 최대 생산지였던 태백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시행으로 현재 거의 모든 탄광이 폐광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흔적과 정취들이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막장에서의 힘겨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아픔의 흔적이오, 또 다른 이에게는 어릴적 뛰놀던 추억이 회상되는 즐거운 기억일 것입니다.

오는 6월 말 태백의 마지막 탄광인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번 공동기획전을 통해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되었던 서민연료 석탄과 산업전사로 불리 운 광부들의 희생과 헌신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부 석탄 증산으로 경제부흥 이룩하자 Part I: Let’s Revive the Economy by Increasing Coal Output
석탄은 산업의 원동력이자 생활필수품입니다. 광복 직후 남한 지역은 석탄 생산량이 매우 적어 연료난에 시달렸습니다. 따라서 석탄 증산은 대한민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정부는 먼저 1950년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해 생산과 공급을 일원화했습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개발지원금을 투입해 탄광 시설을 복구하고 수송을 위한 철도를 부설하여 석탄산업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 결과 석탄 생산은 해마다 증가하여 마침내 석탄의 자급자족을 달성하였습니다. 1966년 연탄파동으로 연탄가격이 폭등하자 정부는 유류 위주의 연료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에 석탄산업이 침체를 거듭하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발생한 제1차 석유파동으로 다시 석탄 증산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석탄시대, 전설의 시작
The Economic Legend Begins with the Coal Era
우리나라 탄광 개발은 1903년 평양광업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의 국권침탈로 평양광업소는 일본 해군성으로 이관되어 자원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지속적으로 지질조사를 실시하며 체계적으로 한반도 자원을 파악했습니다. 광복으로 석탄산업의 주권을 되찾았지만 남한지역에는 산업과 생활에 필요한 석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복구했고, 수송을 위한 산업 철도를 부설하며 생산 증대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50년대 석탄 증산에 공로가 있는 광부에게는 대통령이 직접 모범광부 표창을 했습니다.
잘 키운 석탄산업, 자원강국 안 부럽다
A Well Developed Coal Industry Not the Envy of Resource-rich Nations
최초의 석탄 증산 정책은 1956년 석탄개발5개년계획과 연료종합계획이었습니다. 몇 차례 변경을 거쳐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이어졌고 정부는 지속적으로 석탄 증산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석탄산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했고 1966년에는 석탄 자원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석탄 생산은 광복 당시 연 50만 톤에 불과하였으나 1967년에는 1,200만 톤을, 1980년에는 1,862만 톤의 생산량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석탄 생산량을 늘려 나라에 보답한다는 ‘증산보국(增産報國)’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구호였습니다.
2부 싸이랭 들려온다 일터로 가자 Part II: Let’s Go to Work When the Siren Wails
석탄의 증산 계획에 따라 탄광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국영탄광과 더불어 민간 자본이 투입된 민영탄광도 설립되었습니다.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자 노동자들은 탄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경제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지하 갱 속 깊은 곳에서 묵묵히 작업한 광부들의 노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싸이랭 들려온다 일터로 가자 오늘도 어제같이 씩씩한 걸음” 이라는 「삼탄가」의 가사처럼, 광부들은 쉬지 않고 갑방, 을방, 병방 3교대로 석탄을 생산했습니다.
입갱의 시작, 안전교육
Safety Training at the Mineshaft Entrance
탄광에 들어가기 전 모든 근로자들은 의무적으로 안전교육을 받습니다. 석탄을 생산하는 작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노동 강도가 높고 위험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탄광에서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1957년부터 연이어 발생한 가스 사고 때문입니다. 이 영향으로 1963년 「광산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의무적인 재해방지 교육이 포함되었습니다. 기초교육을 위한 화약, 전기, 운반 등 탄광 작업과 관련한 보안교재가 출간되었고, 현장교육으로는 반드시 작업개시 직전에 안전교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갱 속에서 하는 일
Working in the Mineshaft
지하 깊숙이 매장된 석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칩니다. 우선 석탄이 매장된 탄맥까지 갱도를 뚫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을 ‘굴진’이라고 합니다. 이어 탄층에서 채취하는 과정인 ‘채탄’을 거쳐 불순물을 골라내는 ‘선탄’작업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석탄이 생산됩니다. 탄광 내부에는 부설된 레일을 따라 교통수단의 역할을 하는 광차가 있습니다. 광차는 용도에 따라 생산된 석탄을 운반하는 탄차와 사람을 운송하는 인차로 구분됩니다. 폭발물을 운반하는 차량은 붉은색을 칠해 위험을 표시합니다.
선탄부
Coal Pickers
탄광은 남성 노동자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탄작업은 여성 노동자의 영역입니다. 여성 일자리가 거의 없던 탄광지역에서 선탄부는 보수가 높아 경쟁률이 높았습니다. 가족이 탄광 작업 중 사고로 다쳤거나 사망한 경우 우선적으로 생계를 위해 취업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광부의 도시락
Coal Miners’ Lunchboxes
끊임없이 작업하는 광부들의 유일한 휴식시간은 중식시간입니다. 갱내는 편히 앉아서 쉴 곳도 없을뿐더러 자연광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부들은 갱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동발이나 암석에 걸터앉아 안전등 불빛에 의지해 식사를 했습니다. 탄광에 사는 쥐는 붕괴나 가스 위험 등을 미리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쥐가 도시락을 훔쳐 먹어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대신 높은 곳에 매달아 피해를 방지했습니다.
3부 아빠! 오늘도 무사히 Part III: Daddy! Stay Safe Today
석탄 생산 장려정책이 추진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탄광으로 취업해 들어왔습니다. 안정적인 급여 외에도 사택지급이나 자녀 학자금 등 다양한 복지후생이 제공되는 탄광은 구직자들에게 매력적인 직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탄광은 산업재해의 위험이 항상 존재했으므로 탄광 근로자와 가족들은 하루하루 사고 없이 무탈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 모두의 마음을 담아 사택마을이나 탄광 입구에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는 표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탄광마을 사람들의 삶
Life for Residents of a Coal Mining Village
탄광마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탄광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광부들과 가족들을 위한 사택이 건립되었습니다. 탄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다른 직업보다 많은 봉급이었습니다. 광부들은 일정한 시간 내에 생산한 양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도급제로 급여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리한 작업이 이어지게 되었고 안전사고의 위험도 뒤따랐습니다. 광부들은 탄광을 ‘삶의 전쟁터’라고 말할 정도로 산업재해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어 크고 작은 재해가 빈번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탄광 노동자와 가족들의 공포를 반영한 금기가 많았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흉몽을 꾸면 출근하지 않아도 공식 결근 사유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
A Matter of Life and Death
탄광 작업 현장은 예측 불가한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작업하던 동료와 찰나의 순간으로 생존과 죽음이 엇갈렸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미로 같은 갱도 구조 때문에 일반적인 구조 방식으로는 효율적인 대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산구호대를 별도로 조직해서 사고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구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탄광은 석탄가루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호흡 과정에서 폐에 축적되어 발생하는 진폐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폐재해자들은 은퇴한 이후에도 폐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한편 탄광 현장에서 순직한 ‘산업전사’ 광부들의 넋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곳곳에 세워져 매해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Here, in This Place
마을의 풍경, 광부 아버지의 삶, 어른들에게 들은 탄광의 모습 등 어린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탄광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솔직하고 담백한 어린이의 표현이 담긴 10편의 동시를 통해 탄광 마을 곳곳을 산책해 보면 어떨까요?

에필로그. 그들을 기억하다. Epilogue: Remembering Those People

석탄은 한때 국가 성장의 동력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구조의 변화와 계속되는 채굴로 인한 생산비용 증가로 점차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유가의 안정과 대단위 아파트 건설, 그리고 올림픽 개최로 시행된 환경규제 강화로 일상에서 사용하던 연료가 연탄에서 가스로 전환되면서 석탄의 소비는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1986년 석탄 자원의 합리적인 개발과 효율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석탄산업법」을 제정하고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자율적인 폐광유도와 폐광지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통해 1986년 전국 361개에 이르던 탄광이 대부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2025년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마지막 광업소의 폐광으로 이제 대한민국에는 민영탄광 단 한 곳만 남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남겨진 석탄산업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해 나갈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대표적인 석탄산업 지역에는 석탄박물관이 있습니다. 석탄산업을 문화산업으로 탈바꿈한 문경, 보령, 태백 세 곳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시절 연탄은 누가 갈았나? Who Changed the Briquettes in the Old Days?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떠올리는 겨울철 대표 연료가 바로 연탄입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 시절 겨울, 아랫목에 곤히 자고 있는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깊은 밤이나 새벽에도 잠을 설치며 연탄을 갈았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기억 가득한 연탄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광복 이전에는 규격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2~3개의 구멍이 있는 벽돌모양이나 과자모양의 모나카 탄, 연꽃 열매 모양의 연꽃연탄 등 다양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현재와 비슷한 원통형에 구멍이 9개 뚫린 구공탄이 등장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부산의 삼국상회에서는 프레스기를 사용해 연탄을 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원통형에 구멍이 뚫린 모양의 연탄은 언제부터 전국에서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광복 이후 남한은 극심한 연료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은 해로를 통해 삼척 석탄이 공급되고 미국의 원조 수입탄이 다량으로 도입되어 상대적으로 석탄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이렇게 구한 석탄에 흙과 물을 섞어 틀에 넣고 나무망치로 쳐서 연탄을 제작했습니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온 피난민들이 이것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만들게 되면서 연탄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가정에서 사용되는 주요 연료는 나무였습니다. 전국의 산은 땔감을 얻기 위한 무분별한 벌채로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산림녹화계획을 수립하면서 연료전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이로 인해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도 연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면서 연탄은 대표적인 가정 연료가 되었습니다.
연탄구멍은 모두 몇 개일까?
How Many Holes Are in a Briquette?
우리가 알고 있는 연탄의 형태는 1961년 정부가 연탄 규격을 처음으로 정하면서 연탄이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연탄 사용은 규격에 대한 규제 없이 다양한 형태로 보급되었습니다. 연탄의 형태를 시기별로 구분하면 1기(1961년-1964년), 2기(1964년-1980년), 3기(1980년-현재)로 나뉩니다. 1961년 10월 정부는 최초로 연탄 규격에 대한 기준을 제정·고시하였고, 이듬해 상공부에 의해 대·중·소 3종의 표준규격을 제정하였습니다. 이어 1964년부터는 연탄 규격을 세분화하여 15공탄과 25공탄을 추가로 인정했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연탄 규격은 1980년 10월에 제정된 기준에 따라 제조되고 있습니다. 가정용으로 보급되는 연탄은 22공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연탄가스에 동치미 국물이 특효?
Is Radish Water Good for Carbon Monoxide Poisoning?
연탄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난방과 조리용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겨울철 난방연료인 연탄은 연소 시 독성가스가 발생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탄가스중독은 대표적인 겨울철 재난뉴스였습니다. 연탄가스중독의 원인은 구들장의 깨지거나 갈라진 틈새로 일산화탄소와 같은 유해물질이 침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온수를 데우는 방식의 난방이 확산되면서 연탄가스중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민간요법으로 동치미 국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지만 응급 구조 대응이나 치료 장비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겨울철 차가운 동치미 국물로 의식을 깨워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체험] 미니 연탄 비누 만들기
[Activity] Making Coal Briquette Shapes out of Soap
고된 탄광 작업을 마치고 나온 광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목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택 단위의 작은 목욕탕이 있었는데, 1970년대부터는 광업소 근처에 대형 목욕탕이 세워졌습니다. 목욕은 광업소에서 광부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복지였습니다. 광부들의 목욕 필수품 비누로 미니 연탄을 만들면서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연탄 관련 내용들
1 무연탄 무연탄 이미지 태백석탄박물관 고생대 태백 광산에서 채탄된 무연탄이다. 무연탄은 연소시 화력이 강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석탄은 무연탄이다.
2 『탄전조사보고서』 탄전조사보고서 이미지 태백석탄박물관 1940 조선총독부 연료선광연구소에서 발행한 책으로 태백지역 탄광 개발의 시초가 된 보고서이다.
3 증산보국 편액 증산보국 편액 이미지 문경석탄박물관 1960년대 석탄 생산을 늘려 나라에 보답한다는 증산보국增産報國 편액이다. 석탄 증산을 성공적으로 이루겠다는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구호이다.
4 석탄증산 훈장증 석탄증산 훈장증 이미지 보령석탄박물관 1979 보령 동명광업소장 김재한이 받은 훈장이다. 석탄증산의 공로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5 대통령이 선물한 겨울외투 대통령이 선물한 겨울외투 이미지
대통령이 선물한 겨울외투 이미지
보령석탄박물관 1983 대통령이 광부 14,238명에게 선물한 겨울 방한외투이다. 연말을 맞이하여 전국 각 시도에서 동시에 선물전달식이 개최되었다.
6 은성광업소 전반도 은성광업소 전반도 이미지 문경석탄박물관 1994 은성광업소 갱의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이다.
7 착암기 착암기 이미지 보령석탄박물관 1980년대 착암기는 천공작업에 사용하는 장비로 압축공기를 동력으로 하여 암벽에 구명을 뚫는 기계이다.
8 <식사 Ⅱ>
<선탄부 Ⅱ>
식사, 선탄부 이미지
식사, 선탄부 이미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85 황재형 작
9 아이들로 북적이는 탄광마을 초등학교 아이들로 북적이는 탄광마을 초등학교 이미지 보령석탄박물관   탄광 취업이 늘면서 탄광마을의 인구도 증가했다. 그 영향으로 탄광마을 초등학교의 학생 수도 증가했다.
10 출입금지 경고문 출입금지 경고문 이미지 태백석탄박물관 1993 폐갱 입구에 사고 예방을 위해 부착했던 출입금지 경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