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얼마면 돼?
여러분에게는 목돈이 있습니까? 얼마면 목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생활비만으로도 빠듯한데 목돈 모으기는 사치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테크로 얼마의 이윤을 챙겼다는 사람들의 후일담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사랑마저도 돈으로 사버리겠다는 어느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처럼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전적으로 ‘한몫이 될 만한, 비교적 많은 돈’을 목돈이라고 합니다. 참 애매합니다. 그래서 얼마 정도라야 목돈이라 할 수 있는지, 이 정도면 충분한 것인지, 남들은 얼마나 모으고 있는지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가능하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불리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사회 변화에 따라 ‘목돈의 꿈’도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내 집 마련, 자녀 교육, 가족 병원비 등 생활 안정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목돈을 마련하는 경향이 짙었다면 근래에는 ‘경제적 자유’를 꿈꾸며 부동산이나 주식 또는 그 밖의 다양한 금융 상품에 투자하여 목돈을 만들고 키우려는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얼마면 돼?’는 결국 ‘우리는 왜 목돈을 모으는가?’와 같은 선상의 질문입니다. 이유가 있고 목표가 분명하다면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지혜롭게 경제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우리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경제 성장을 이뤄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필로그> 목돈이 이루게 해준 꿈이 있나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호황과 불황이 일정한 주기를 두고 번갈아 발생합니다. 이 경기 변동은 정부, 기업과 함께 경제의 3대 주체로 손꼽히는 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경기 변동에 따라 우리가 자산을 축적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죠. 달라지지 않는 것은 때로는 과감한 투자로, 때로는 더 절약하는 방식으로 목돈을 모으려 애쓰는 우리의 노력이 아닐까요?
목돈을 모으는 과정에도 부침이 있기 마련입니다.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대세를 따르다가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대박 소식에 배 아파한 기억도 있을 겁니다. 금리 변동에 따라 좋았다 나빴다 우리의 표정도 수시로 바뀌고요. 한편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사정에 맞는 경제 활동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개인의 노력, 가계의 노력이 모여 우리나라 경제도 세계 10위권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목돈 자체를 꿈꾸기도 하지만 목돈이 이루게 해준 꿈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꿈들을 이루셨나요? 목돈에는 정해진 금액이 없습니다. 용돈, 월급, 매출 등 자신의 소득을 모아 꿈꾸던 무언가를 이루는 데 보탤 수 있었다면 목돈으로 꿈을 이뤄본 것이라 믿습니다. 목돈을 모아 이룰 수 있었던 꿈, 그 과정에서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지혜로운 경제생활은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꿈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더 알토란 같은 ‘목돈의 꿈’을 이뤄나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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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금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일본의 금고 제작사 아사히에서 출시한 금고. 기증자 박재희는 제일은행의 전신으로 조선저축은행의 행원이었던 조부의 소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927년 7월 1일 서민금융기관으로 설립된 조선저축은행은 저축예금 업무만 하다 광복 후 1946년 4월부터 시중은행으로 전환됐다. 금고가 있던 가정집이 흔하지 않던 시절 기증자의 집안에서는 이 금고에 부동산 문서나 여러 귀중품을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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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미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62
쌀을 절약하기 위해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낸 쌀을 담아 보관하던 절미통은 자산 보관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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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53~1962
1956년 1월 5일 권용학·윤석진·김백두에 의해 작성된 '삼일계' 장부이다. 총 8장으로, 내용은 계의 설립배경, 계원의 이름을 적은 '首題(수제)', 계모임 날짜와 곗돈 이자에 대한 규칙을 적은 '凡例契則(범례계칙)', 1953년 1월 5일부터 1962년 7월 그믐날까지 곗돈의 출납장부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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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후생복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7
1947년 11월에 전라북도후생복권협회에서 이재민(罹災民) 주택 건축 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발행한 제1회 후생복표로, 복권 1장당 50원에 판매하였다. 앞면에는 복권 회차, 복권 번호, 복권 발행 목적과 추첨일(1948년 1월 10일) 등이 인쇄되고, 발행처명 위에 인장이 찍혀 있다. 뒷면에는 복권 등수별 당첨 방법 및 금액 안내와 지급 기한, 당첨금 수령 방법 등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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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사채증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72
1972년 국무회의에서 의결, 공포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에 의한 특별금융조치의 시행으로 사채조정이 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사채동결조치의 주요 내용은 긴급명령 제32조제1항에 의한 신규대출은 일반상환과 특별상환으로 나누어 정한다는 것, 상환하게 할 금액은 금융자금대출금과 신탁자금대출금을 구분하여 계산한다는 것, 신규대출은 대출한 날부터 3년간 거치하고 그 거치기간의 종료일로부터 5년간에 걸쳐 6월마다 균등액을 상환한다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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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복금부 건국기념예금증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9
1949년 조선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에서 복권 형태로 발행한 '건국기념예금증서'다. 해방 후 부족한 재원 조달과 연평균 100%가 넘는 물가 상승을 막고자 저축독려 차원에서 등장한 저축과 복권을 결합한 복운예금 1등 당첨자는 10만원의 상금을 받았는데, 당시 고소득군에 속한 목수의 월급이 평균 12.1원임을 고려하면, 688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큰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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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처럼 후회말고 개미처럼 저축하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70년대
재무부(財務部)에서 저축의 날에 저축을 장려하기 위하여 발행한 표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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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1조 저축 저금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70년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농협상호금융에서 추진한 농어촌 1조원 저축 운동을 기념하여 제작한 저금통이다. 뚜껑에 돈을 넣을 수 있는 홈이 있고, 경첩과 잠금 고리가 달려있다. 뚜껑 상단에 농협 로고가, 앞면에 '농어촌 1조 저축', '부용농협' 문구가 찍혀 있음. 측면에는 '땀흘려 일하고', '쓰기 전에 저축하여', '보람 있게 살아보세' 문구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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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교육보험 저금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복 이후
대한교육보험에서 제작한 나무 저금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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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채상환 금모으기 범국민운동 판매위탁증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98
1998년 당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시행했던 금모으기 운동때 사용했던 판매위탁증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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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보험 전단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60
교육주기별 교육비와 총 보장액 등이 나와있는 교육보험 전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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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장미아파트 분양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78
서울 송파구 잠실6동에 라이프주택개발이 3차에 걸쳐 1979년에 지은 3,402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 분양 안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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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탁과 격탁받침대
한국거래소
1956
1956-1975년 사용했던 격탁받침대다. 당시의 집단경쟁매매는 증권시장의 입회장에서 집단경쟁매매를 할 때 매도측과 매수측을 집합시켜 놓고 개개의 거래원이 자유로운 가격으로 매매거래에 참가하여 매도·매수 가격과 수량이 합치된 순간 딱따기로 약정 가격을 성립시키는 매매 방법이다. 일명 격탁매매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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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채권 포스터
한국거래소
1970년대
1973년에 재무부에서 발행하여 배포한 소액채권포스터다. 정부는 내자동원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 증권시장의 육성에 나섰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계획의 투자재원 중 절반 이상은 차관에 의존하고 있었고 기업의 자금 조달도 직접금융 비율이 저조했다. 따라서 정부는 1970년대까지 국내 저축을 늘리고 시중 자금을 금융기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예금자의 이익을 높이는 '금리현실화 조치(1965)', '고금리 소액채권발행'등을 실행했다. 그리고 각종 경조금을 현금 대신 소액채권으로 내자는 '채권생활화 범국민 운동'을 벌였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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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경매입찰함
한국거래소
1970년대
주식경매 입찰 시 사용했던 함으로 전시된 크기의 함과 3배 큰 사이즈의 함이 같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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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표 분류기
한국거래소
1979~1997
1979-1997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가표 분류함이다. 시장대리인이 호가표를 제출하면 포스트 내의 거래소 직원이 종목에 따라 호가표를 분류하는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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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표, 호가표 접수기, 호가표 제출시간 기록기
한국거래소
1979~1997
수작업매매시기 증권시장에서 사용되었던 호가표와 호가표 접수기이다. 과거 수작업 매매시의 개별경쟁매매는 시장대리인이 증권거래소가 정하는 양식의 호가표를 매매대에 있는 증권거래소 직원에게 제출하고, 직원은 이를 접수하여 매매체결원칙에 따라 수기로 호가내역을 호가집계표에 집계하여 매매를 체결했다. 매매주문순서 뒤바꾸기 행위를 막기 위해 주문표에 접수시간을 기재, 즉각 증권공동온라인에 입력하고 주문표를 거래소 매매포스트에 제출할 때는 주문순서에 의한 일련번호별 일람표를 작성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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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무선증권 단말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00년대
1997년 4월 1일 가정용 투자 시스템 (HTS: Home Trading System)이 도입된 이후 1990년대 말부터 휴대용 무선 증권 단말기를 증권가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이후 PDA를 거쳐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모바일 투자 시스템(MTS: Mobile Trading System)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